소유욕은 통제욕의 변형, 의존은 자기 부재를 타자로 메우는 미성숙, 거래는 시장 논리의 관계화다.
② 의무로서의 사랑
강제되거나 당위로 수행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③ 자기 이익만을 위한 관계
타자를 오직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사랑에서 배제한다. 다만 실제 관계에서 사랑과 자기 이익이 뒤섞이는 문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본다.
④ 진화·생존 기능
유전자 보존이나 상호 이타성은 사랑의 기원을 설명할 뿐 사랑 자체의 정의는 아니다.
⑤ 이데올로기 비판
권력 분석은 사랑의 정의가 아니다.
⑥ 신화와 통념
소울메이트나 운명적 사랑은 사랑을 설명하는 정의가 될 수 없다. 운명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여기서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왜 하필 이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운명이니까”라고 답하는 순간 사랑을 더 이상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에서 제외한다.
2-4. 세 개 핵심으로 압축
배제 후 남은 것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① 타자와의 관계 - B, C, E
② 결단과 실천 - D
③ 시간 속 결속 - F
이 셋이면 거의 모든 사랑 현상을 좌표 위에 놓을 수 있다.
2-5. 왜 하필 이 사람인가?
그러나 이 셋만으로는 ‘왜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이 사람인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그 답을 대체불가능성에서
찾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어떻게 선택되고, 어떻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가?
이 질문은 정의를 세운 뒤에 답한다.
3. 나의 정의
내가 도달한 정의는 이것이다.
사랑이란 고유한 이력으로 맺어진 누군가를 동질감에서 나오는 이해와 배려로 대하는 것이다.
길게 말했지만 결국 사랑의 핵심은 이해와 배려다. 고유한 이력, 대체불가능성 같은 말들은 엄밀한 정의를 내리려다 보니 붙은 논리적 실드(shield)들이다. 사랑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나는 그냥 이해와 배려라고 답하겠다.
사랑은 모든 인간에게 베푸는 일반적인 선의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가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 이 사람인가?
이 질문에는 사실 두개의 질문이 들어 있다. 왜 그 사람과 시작했는가? 그리고 왜 이제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는가?
왜 그 사람과 시작했는가에 대한 솔직한 답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다. 외모가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고, 성격이 맞았을 수도 있다. 외로울 때 마침 곁에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제한되어 있고, 그 가운데 욕망은 어떤 사람을 골라낸다. 기회와 우연이 사람을 내 앞에 데려오고, 욕망이 그중 누군가에게 나를 끌어당긴다.
거기까지는 사랑이 아니다.
욕망도 완전히 무작위는 아니다. 내가 어떤 외모와 성격에 끌리는지에는 패턴이 있으므로 사랑이 시작될 후보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욕망을 통해 후보를 예측할 수 있다. 사랑은 후보만으로 예측할 수 없다.
욕망이 그 사람을 골랐다고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저 인간도 나와 같구나” 하고 나와 같은 욕구와 두려움, 기쁨과 고통을 가진 인간으로 보기 시작할 때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
동질감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골라진 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게 하는 토대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이 남는다. 왜 이제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는가?
처음 나를 끌어당겼던 조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나보다 더 아름답고, 더 다정하고, 더 잘 맞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 조건만이 이유였다면 더 좋은 조건의 사람으로 교체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사랑에서는 그렇지 않은 일이 생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시간이 쌓인다. 함께 겪은 사건, 서로에게 한 말, 도움과 상처, 싸움과 화해, 둘만 아는 기억이 생긴다. 같은 조건을 가진 다른 사람은 나타날 수 있어도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생긴 고유한 이력(shared history)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대체불가능성은 그 사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도 있다.
처음에는 조건 때문에 선택했어도 나중에는 조건만으로 바꿀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솔직히 불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운명론자다. 사랑도 운명이라 믿는다. 그런데도 앞에서 운명을 배제한 이유가 있다.
“왜 이 사람인가”에 “운명이니까”라고 답하는 순간 분석은 끝난다. 운명은 모든 만남을 설명하므로 어떤 만남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을 해부하는 동안에는 운명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해부가 끝난 뒤에도 마지막 물음은 남는다. 우연과 욕망이 시작에 관여하고 함께한 시간이 고유한 이력을 만든다 해도, 그 우연이 왜 하필 그렇게 떨어졌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 물음 앞에서 나는 운명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다.
다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고백이고, 분석이 아니라 태도다. 이 책은 분석까지만 책임진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바꿀 수 없는 그 사람에게 동질감이 이해와 배려로 이어질 때 사랑이 된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대체할 수 없는 친구를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그 우정 역시 사랑이다.
이해는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이고, 배려는 상대의 안녕을 고려하고 가능한 경우 그것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배려가 아니며, 따라서 사랑도 아니다. 반대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행동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할 수 없었다'는 판정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내려지기 쉽다. 여기에도 솔직함이 필요하다.
레비나스가 절대적 타자성을 강조한다면 나는 반대로 동질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다른 타인이기에 존중해야 하고, 생로병사의 운명 앞에서는 같은 인간이기에 사랑할 수 있다.
3-1. 만연한 착각
이성에게 끌려 설레고 자기 취향에 맞아서 기쁜 감정은 그 자체로 사랑이 아니다. 우선 욕망과 끌림의 영역이다.
누구도 다른 이의 취향에 완전히 들어맞을 수 없다. 아무리 너그럽게 봐도 그것은 사랑의 가능성일 뿐이다. 씨앗을 꽃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하물며 섹스는 더더욱 사랑이 아니다.
3-2. 사랑과 성욕
성욕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 특정 대상에 쏠리며 때로 미친 듯이 강하게 작용한다. 여기서는 성욕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성욕의 구분에 집중한다.
이성 간의 사랑도 당연히 사랑이다. 다만 많은 사람이 성욕을 사랑으로 오해한다. 성욕이 있건 없건 동질감, 이해, 배려가 함께 작동한다면 사랑의 범주에 들어간다. 섹스만 있고 그것들이 없다면 그냥 떡치는 관계다. 떡치다가 사랑으로 발전한다는 보장이 없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입장을 받아들여 대중문화와 문학이 사랑으로 포장하는 첫눈에 반함, 열정, 운명의 상당 부분을 성욕으로 본다. 욕망과 환상이며 오래 지속되지 않는 생물학적 반응이다.
필자도 경험한 터라 그 입장이 되면 이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도 머리로나마 알고 있는 것과 아예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다.
섹스는 번식의 수단이자 독특하고 강렬한 쾌락이며 문화와 예술의 오랜 소재다. 동시에 억압과 죄악시의 대상이었고 범죄와 사회문제에 얽히며 사랑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사랑만큼이나 의미 깊은 주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따로 다룬다.
4. 남은 질문들
앞의 분류와 배제를 마치고도 네 가지 질문이 남는다.
타자를 위한 사랑은 가능한가? 사랑은 감정인가 행위인가?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한가? 그리고 가장 까다로운 질문, 사랑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 아닌가?
앞서 도출한 정의를 기준으로 하나씩 답해 본다.
질문1. 타자를 위한 사랑은 가능한가?
가능하다. 사랑의 최소 조건은 희생의 크기가 아니다. 상대를 이해하고 그의 안녕을 배려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작은 희생도 사랑이다.
질문2. 사랑은 감정인가 행위인가?
둘 다다.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고 배려는 행위를 포함한다. 행위는 가능한 경우에 요구된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나, 상대에게 닿을 방법 자체가 없는 경우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했다.
질문3. 사랑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가?
그렇다. 그러나 짧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시간 자체가 사랑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은 두 사람만의 이력을 만든다. 사랑은 짧은 시간에도 생길 수 있지만, 시간이 쌓일수록 이력은 두꺼워지고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확신도 강해진다.
질문4. 사랑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 아닌가?
가장 센 반론이다.
가족애는 내 유전자를 위한 투자고, 부부의 헌신은 내 울타리 유지비이며, 연애는 내 욕망의 충족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라 불리는 것 전부가 결국 자신을 위한 행위 아닌가. 이 반론이 맞다면 이 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정의를 세운 셈이 된다. 일부는 맞는 말이다. 그러면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를 본다.
첫째, 기원은 본질이 아니다.
사랑이 유전자 보존 장치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것의 출신이 그것의 현재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음악이 구애 신호에서 나왔을지 몰라도 바흐의 푸가는 구애가 아니다. 유전자는 사랑이라는 장치가 왜 설치됐는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기계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까지 규정하지는 못한다.
입양한 아이를 제 자식처럼 기르고,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하려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 인간에게 생겨난 능력은 그 능력을 만들어낸 최초의 기능을 넘어 사용될 수 있다.
둘째, "결국 네 만족이잖아"는 논증이 아니라 말장난이다.
친구가 물에 빠졌다. 내가 뛰어들어 친구를 구했고 살아난 친구를 보고 기뻤다. 내가 기뻤다는 사실만으로 "기뻐지기 위해 친구를 구했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친구가 살아남기를 바랐고, 친구가 살아났기 때문에 기뻤을 수도 있다.
행위에서 만족을 얻었다는 것과 만족을 얻기 위해 행위했다는 것은 다르다. 결과를 동기로 뒤집을 수는 없다.
셋째, 그렇다고 우리의 사랑이 모두 순수하다는 말은 아니다.
부모의 사랑에는 기대가, 부부의 헌신에는 자기보존이, 우정에는 교환이 함께 있다. 실제 관계는 대부분 사랑과 자기 몫이 뒤섞여 있다.
여기서 사랑의 존재와 함량을 구분해야 한다. 상대의 안녕을 그 자체로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사랑은 존재한다. 자기 몫이 함께 섞여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때부터는 사랑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함량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시금석을 제안한다.
※울타리 테스트 : 내가 얻을 몫이 사라져도 그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가?
자식이 기대를 배반해도 그의 행복을 바라는가? 쓸모가 없어진 친구를 여전히 아끼는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의 배우자를 보살피는가?
이 테스트는 유전자나 진화적 기원을 판별하지 않는다. 현재 내 마음이 나를 향하는지, 상대를 향하는지를 재는 것이다.
한쪽 끝에는 철저한 자기 이익이 있고 반대쪽 끝에는 자기 몫이 전혀 없는 순수한 사랑이 있다. 순수한 사랑이 실제 인간에게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순금은 실물이 아니라 기준점이다.
자기 몫이 섞였다고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3할짜리 사랑을 순금이라 부를 필요가 없다.
3할이면 3할인 채로 사랑하면 된다.
문제는 이기심이 아니라 이름 도용이다. 투자에 사랑의 이름을 걸고, 욕망에 사랑의 이름을 붙여 실상을 가리는 순간 위선이 시작된다. 사랑에서도 위선의 문법은 같다. 진짜 동기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요구되는 것은 완벽한 순도보다는 자기 순도에 대한 정직이다.
내가 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내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무엇이 남는가? 그 남은 것 가운데 얼마가 그 사람의 안녕을 향하고 있는가?
울타리가 흔들리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의 사랑조차 확신할 수 없다. 그 불확실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에 관한 한 위선의 반대말이다.
마치며
이 글의 핵심은 결론 자체보다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 있다. 37개 정의를 모으고, 묶고, 배제하고, 환원하는 작업은 사랑의 액기스를 찾기 위한 내 사유의 기록이다.
고유한 이력으로 맺어진 누군가를 동질감에서 나오는 이해와 배려로 대하는 것. 그것이 내가 끝내 도달한 사랑의 뼈대다.